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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년 은돌라 UN DC-6 추락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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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61년 은돌라 UN DC-6 추락 사건은 1961년 9월 18일, 콩고 내전 중 휴전 협상을 위해 잠비아의 은돌라로 향하던 유엔 사무총장 다그 함마르셸드가 탑승한 더글러스 DC-6B기가 추락한 사건이다. 사고로 함마르셸드를 포함한 16명 전원이 사망했으며, 사고 초기부터 암살 가능성이 제기되어 여러 차례 조사가 이루어졌다. 공식 조사에서는 사고 원인을 특정하지 못했으나, 격추설 및 서방 정보기관 개입 의혹이 끊임없이 제기되었다. 2015년에는 새로운 정보 조사를 위한 독립 전문가부가 선임되었으며, 2017년 유엔 보고서는 외부 공격 또는 간섭에 의한 추락 가능성을 시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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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년 은돌라 UN DC-6 추락 사건 - [전쟁]에 관한 문서
사고 개요
사고 유형조종사 과실에 의한 지형 충돌 또는 격추
지상에 있는 4발 항공기
추락한 항공기와 유사한 DC-6
발생일1961년 9월 18일
위치은돌라 공항 서쪽 15km 지점
좌표12°58′31″S 28°31′22″E
항공기 종류더글러스 DC-6B
항공기 등록번호SE-BDY
운영 주체에 의해 트랜스에어 스웨덴이 전세낸 항공기
출발지엘리자베트빌 공항
경유지은질리 국제공항
목적지은돌라 공항
승객11명
승무원5명
부상자0명
사망자16명 (전원)
생존자0명

2. 운항 기재

항목내용
기종더글러스 DC-6B
엔진프랫 & 휘트니 R-2800 4기
기체 기호SE-BDY
제조 번호43559/251
소유트랜스 에어 스웨덴 (유엔 전세기)



해당 기체는 전세 항공 전문 항공사였던 트랜스 에어 스웨덴 소유로, 승무원을 포함하여 유엔에 전세되어 있었다.

3. 사건 발생

1961년 9월, 함마셸드 탑승기의 비행 경로(분홍색 선)와 미끼기의 비행 경로(검은색 선)


1961년 9월, 콩고 내전 중 전투 목적이 아니었던 유엔 부대와 모이즈 촘베를 수상으로 하는 카탕가 공화국의 병력이 교전 상태에 빠지자, 유엔 사무총장 다그 함마르셸드가 휴전 협상을 위해 향하던 중, 9월 18일 로디지아 니아살랜드 연방은돌라(잠비아) 부근에서 탑승기가 추락했다. 함마셸드를 포함한 승객과 승무원 16명 전원이 사망했다.[1]

추락 사고를 접수한 로디지아 니아살랜드 연방 수상 로이 웰렌스키는 병리학자 휴 더글라스 로스를 은돌라로 파견했다. 로스는 영국 공군의 병리학자 스티븐스와 함께 희생자 16명 전원의 시신을 검시했다. 여기에는 사고 당시에는 생존했지만, 심각한 화상을 입고 한 번 의식을 회복했지만 5일 후에 사망한 유엔 경호원 1명도 포함되어 있었다. 로스와 스티븐스는 그 후 영국으로 이동하여 검시 결과를 정리했다. 이후의 조사에서 참조된 의학적 증거는 로스가 제출한 것이다. 추락 사건에 관해 로스가 작성한 자료는 현재 던디 대학교가 소장하고 있다.[1]

사고 이후 유엔이 작성한 특별 보고서에 따르면, 1시경 하늘에서 밝은 섬광이 목격되었고, 그 보고에 따라 수색 구조 활동이 시작되었다. 추락 당시부터 이것이 사고가 아닐 가능성이 제기되었기에, 이후 여러 차례 조사가 실시되었으며, 사무총장의 암살 혐의가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1]

4. 공식 조사

다그 함마셸드의 죽음을 둘러싸고, 추락 상황에 대해 이듬해까지 세 개의 공식 조사 기관이 발족되었다.[2],[3],[4]

조사 기관활동 기간특징
로디지아 조사 위원회1961년 9월 19일 ~ 11월 2일영국군 중령 지휘
로디지아 심문 위원회1962년 1월 16일 ~ 1월 29일유엔과는 독립적으로 공청회 개최
유엔 조사 위원회1962년일련의 공청회 개최, 일부는 선행된 두 개의 공식 조사에서 얻은 증언에 의존. 네팔의 외교관 Rishikesh Shah|리시케시 샤영어가 위원장으로 선출됨.



세 개의 공식 조사에서는 추락 원인이 특정되지 않았다. 로디지아 조사 위원회는 추락 원인의 물증을 찾기 위해 180명의 인원을 투입하여 추락기가 거친 비행 경로의 종말 부분에 따라 6제곱킬로미터(6km2)의 지역을 수색했지만, 폭탄이나 지대공 미사일, 하이재킹 등의 증거는 발견되지 않았다. 공식 보고에 따르면 사망한 스웨덴인 경호원 2명의 시신에는 여러 발의 총상이 있었다. 이에 관해 로디지아 조사 위원회가 실시한 검시 결과가 유엔 조사에서도 채택되었지만, 그에 따르면 총상은 얕고, 총탄에 선조흔은 없었다고 하며, 경호원 근처에 있던 탄창이 화재 속에서 폭발한 것으로 결론지었다. 추락기의 잔해에서 어떤 범행을 시사하는 증거는 다른 것은 발견되지 않았다.

하늘에서 밝은 섬광이 보였다는 증언은 추락을 일으켰다고 하기에는 시간이 너무 늦어 기각되었다. 유엔 보고에서는 이러한 섬광이 추락 후에 발생한 2차적인 폭발이 아니겠냐고 했다. 승객 중 함마르셸드의 경호원이었던 미국의 해롤드 줄리안 군조는 추락으로 부상했지만 생존한 채 발견되었다. 줄리안은 은돌라 병원에 수용되었고, 추락 전에 하늘에서 여러 섬광을 보았다거나, 기내에서 폭발이 있었다고 의사들에게 말했다. 치료에 관여한 의사에 따르면 줄리안은 적절한 설비를 갖춘 병원으로 이송하면 충분히 살 수 있는 상태였지만, 그대로 방치되어 5일 후에 신부전으로 사망했다. 공식 심문에서는 그와 대화한 사람들의 증언은 일치하지 않는다고 기각되었다.

유엔 보고서는 확립된 수색 및 구조 절차를 위반한 많은 지연이 있다고 언급하고 있다. 세 가지의 개별적인 지연이 있었다고 한다.

# 항공기가 조난했을지도 모른다는 초기 인식이 늦었다.

# 해당기가 주변의 어떤 공항에도 착륙하지 않았다는 확인이 늦어져, 조난 발생의 사실 인식이 지연되었다.

# 은돌라 공항에서 불과 15km에 위치한 추락 현장에 대한 수색 구조 활동과 잔해 발견 자체가 늦었다.

검시 결과는 함마르셸드의 사인을 특정할 수 없었다. 어떤 보고서는 함마르셸드가 추락 시 즉사했다고 하고 있지만, 다른 보고서는 구조 활동이 늦지 않았다면 살았을지도 모른다고 하고 있다. 유엔 보고는 또한 구조를 서둘렀다면 줄리안 군조가 생존했을 가능성은 "무한히" 높아졌을 것이라고 하고 있다.

5. 격추설 및 암살 의혹

여러 공식 조사에도 불구하고, 다그 함마르셸드의 죽음이 사고가 아닌 격추 또는 암살이라는 주장이 꾸준히 제기되고 있다.

사고 이후 유엔이 작성한 특별 보고서에 따르면, 새벽 1시경 하늘에서 밝은 섬광이 목격되었고, 그 보고에 따라 수색 구조 활동이 시작되었다. 추락 당시부터 이것이 사고가 아닐 가능성이 제기되었기에, 이후 여러 차례 조사가 실시되었으며, 사무총장의 암살 혐의가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함마르셸드의 죽음을 둘러싸고, 이듬해까지 로디지아 민간 항공국에 의한 로디지아 조사 위원회,[2] 공청회를 연 로디지아 심문 위원회,[3] 그리고 유엔 조사 위원회[4]의 세 공식 조사 기관이 발족되었다. 로디지아 조사 위원회는 1961년 9월 19일부터 11월 2일까지, 로디지아 심문 위원회는 1962년 1월 16일부터 1월 29일까지, 유엔 조사 위원회는 1962년에 각각 활동했다. 유엔 조사 위원회는 네팔의 외교관 Rishikesh Shah영어를 위원장으로 선출했다.

세 공식 조사에서는 추락 원인이 특정되지 않았다. 공식 보고에 따르면 사망한 스웨덴인 경호원 2명의 시신에는 여러 발의 총상이 있었으나, 얕고 선조흔이 없어 경호원 근처 탄창이 화재로 폭발한 것으로 결론지었다. 추락기의 잔해에서는 범행을 시사하는 증거가 발견되지 않았다.

하늘에서 밝은 섬광이 보였다는 증언은 추락을 일으키기에는 시간이 너무 늦어 기각되었고, 추락 후 발생한 2차적인 폭발로 추정되었다. 함마르셸드의 경호원이었던 미국인 해롤드 줄리안 군조와의 대화는 일관성이 없어 기각되었다.

유엔 보고서는 수색 및 구조 절차에 세 가지 지연이 있었다고 지적했다. 첫째, 항공기 조난 가능성 초기 인식 지연, 둘째, 주변 공항 착륙 여부 확인 지연, 셋째, 은돌라 공항에서 불과 15km 떨어진 추락 현장 수색 및 잔해 발견 지연이다. 검시 결과는 함마르셸드의 사인을 특정할 수 없었으나, 구조가 빨랐다면 생존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보았다.

당시 에티오피아 주재 영국 대사 Denis Wright영어는 1961년 연례 보고서에서 함마르셸드의 죽음과 영국의 관련성을 시사했다. 콩고 유엔 부대 합류 병력을 태운 에티오피아 수송기의 엔테베 경유 영국 통치하 우간다 상공 통과가 함마르셸드 사망 전에는 거부되었으나, 사망 후에는 허가되었다는 것이다. 이 보고서를 본 외무성 직원은 영국에 불리한 내용이므로 삭제해야 한다고 적었다.

1961년 9월, 콩고 내전 중 유엔 부대와 모이즈 촘베 수상의 카탕가 공화국 병력이 교전 상태에 빠지자, 다그 함마르셸드 유엔 사무총장이 휴전 협상을 위해 로디지아 니아살랜드 연방 은돌라로 향하던 중 탑승기가 추락했다.

2013년 9월, 영국의 법률가 Stephen Sedley영어가 이끄는 독립 조사 위원회는 재조사 가치가 있는 근거가 있다며 유엔에 심문 재개를 권고했다.

5. 1. 촘베 정부와 카탕가 공군에 의한 격추설

카탕가국 공군의 프랑스제 CM-170 2인승 훈련기가 7.62mm 기관포로 DC-6를 격추했다는 설이 있다.[2]

레오폴드빌 콩고(현재의 콩고 민주 공화국)의 정치인 모이즈 촘베는 카탕가 주의 분리 독립을 주도하여 카탕가국을 설립했다. 당시 카탕가국 촘베 대통령의 군대와 아일랜드 유엔 평화유지군은 콩고에서 교전 중이었고, 다그 함마르셸드휴전을 요청하러 가던 중 비행기가 추락해 사망했다.[2] 전직 미국 해군 조종사이자 미국 국가안보국(NSA) 요원이었던 찰스 사우스홀(Charles Southall)은 1961년 추락 사건 당시 키프로스에서 무선 감청 중이었는데, 은돌라 상공 3,000 마일(약 4,800km) 거리에서 DC-6 조종사가 전투기에 공격받아 추락하고 있다는 무선 교신을 들었다고 증언했다.[2]

2014년 4월, 영국 가디언지는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영국 공군 조종사 출신 얀 판 리세험(Jan van Risseghem)이 프랑스제 CM-170 2인승 훈련기로 DC-6를 요격했다는 보도를 했다.[2] 리세험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벨기에 공군 조종사가 되었으며, 모이즈 촘베의 카탕가국 공군 조종사로 매우 유명했다.

5. 2. 서방 정보기관 개입설

다그 함마셸드 사망 당시, 미국과 그 동맹국의 정보 기관은 콩고 내전 정세에 깊이 관여하고 있었다. 벨기에와 미국은 카탕가 분리 독립을 지지했고, 파트리스 루뭄바 전 총리 암살에 이르렀다. 벨기에와 영국은 콩고의 구리 광업 이권 대부분을 장악하고 있었으며, 콩고가 독립국으로 이행함에 따라 기득권 유지를 원했다. 구리 광업이 국유화될 수 있다는 우려는 루뭄바 또는 함마셸드를 제거할 경제적 동기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초기 조사는 기체의 상황이나 유해 검시에 관한 대부분의 정보를 제공했지만, 영국 군 장교가 관여했다는 점에서 이해 상충 지적이 있다.

1998년 8월 19일, 남아프리카 공화국 진실 화해 위원회(TRC) 의장 데즈먼드 투투 대주교는 새로 밝혀진 문서에서 추락 사건에 영국의 MI5, 미국 CIA, 남아프리카 정보 기관의 관여가 시사되었다고 말했다. TRC가 공표한 한 문서는 기체가 착륙할 때 폭발하도록 착륙 장치 수납부에 폭발물이 설치되었다고 한다. 투투는 TRC에는 그러한 문서 및 남아프리카와 서방 정보기관이 추락에 관여했다는 설의 진위를 조사할 능력이 없다고 말했다. 영국 외무·영연방부는 그것들이 소련에 의한 오보나 가짜 정보가 아닌가 하고 있다.

2000년대 스웨덴인으로 아프리카에 거점을 둔 개발 원조 기관에 근무하는 고란 비요크달은 개인적인 관심에서 현지 주민 목격자 12명을 인터뷰했다. 이들의 증언은 함마셸드의 탑승기가 다른 비행기에 격추되었다는 점에서 일치하고 있다. 그중 한 명은 추락 후 아침 5시에 현장 근처의 숯 가마에 갔는데, 백인 병사 일행이 현장을 봉쇄하고 주민들을 몰아내는 것을 보았지만, 구조대가 현장에 도착한 것으로 알려진 공식 시각은 같은 날 오후 3시이다. 비요크달은 이전에 열람 불가했던 문서와 유엔 내부의 통신 기록을 조사하여 사건이 유니온 미니에르 등의 광업 회사의 이권 옹호를 목적으로 한 의도적인 격추였다고 결론 내렸다. 키프로스의 전자 첩보 시설에 배속되어 있던 한 미군 장교는 은돌라에서 오간 기상 통신을 도청했다. 그 안에서는 한 조종사가 함마르셸드가 탑승한 DC-6에 접근하려 한다는 말을 했고, 사격 소리에 이어 "명중했다"는 말이 들렸다.

5. 3. 기타 의혹

함마르셸드 총장의 시신에서 발견된 이마의 둥근 구멍은 총상일 가능성이 제기되었다. 노르웨이 군인 비요른 에게 소장은 최초로 현장과 시신을 확인한 인물 중 하나로, 이 구멍이 총상이라고 주장했다. 에게 소장에 따르면, 함마르셸드의 시신은 다른 시신과 달리 화상을 입지 않았으며, 이마에 둥근 구멍이 있었고, 이후 사진에서는 이 구멍이 보정되었다고 한다. 그는 또한 추락 현장이 은돌라 공항에서 불과 15km 떨어진 곳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수색 구조 활동이 반나절 이상 지연된 점에 대해서도 의문을 제기했다. 에게 소장은 함마르셸드가 비행기에서 튕겨져 나갔으며, 손에 풀과 잎을 쥐고 있었던 것으로 보아 생존하여 잔해에서 대피하려 했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2009년 9월 23일, 리비아카다피 대령국제 연합 총회에서 파트리스 루뭄바 총리와 함마르셸드 총장의 죽음에 대한 유엔 조사 기구 설립을 요청했다.

6. 공식 조사의 재개

2015년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은 다그 함마르셸드의 죽음에 관해 새로운 정보를 조사할 독립 전문가부를 선임했다. 해당 부의 장은 탄자니아 대법원장 모하메드 찬데 오스만Mohamed Chande Othman영어이며, 다른 2명은 국제 민간 항공 기구(ICAO)의 호주 대표 켈린 매콜리와 덴마크 국가 경찰의 탄도학 전문가 헨리크 랄센이었다. 해당 부는 2015년 6월 12일에 유엔 사무총장에게 보고서를 제출했다.[5]

2017년 10월 25일, 유엔은 오스만 등이 작성한 보고서 내용을 공표했다. 보고서에서 오스만은 과거 공식 보고서에서의 조종사 과실 등에 의한 사고설에 부정적인 견해를 표명하며, 외부로부터의 직접 공격 또는 어떤 간섭에 의한 추락을 시사했다. 그는 사태를 해명할 책임은 유엔 가맹국의 관계 각국이 "공개, 비공개를 막론하고 압수 또는 작성한 자료에 대한 관련 정보의 재정밀을 완료하는 것"에 달려 있다고 말했다.[5] 오스만은 조사에 관해 서방 각국으로부터 어느 정도 협력은 얻었지만, 정보의 완전한 공개는 여전히 거부당하고 있는 상황임을 시사했다.[5]

2018년 3월 27일, 안토니우 구테흐스 유엔 사무총장은 본 사건에 관한 조사를 지속하기로 결정하고, 계속해서 오스만을 그 임무에 맡길 것을 표명했다.[5]

2019년 1월 12일, 가디언지는 격추설이 다시 부상하고 있다고 보도했다.[5]

7. 추모

웁살라에 있는 함마르셸드의 묘


추락 현장에는 추도비와 전시 시설(Dag Hammarskjöld Crash Site Memorial(en))이 설치되어 있으며, 유네스코 세계유산 후보 목록에 등록되어 있다.[1] 콩고 공화국 총리 시릴 아둘라는 다음과 같이 보도 발표했다. "(전략) 서방 경제 지배자들의 부끄러운 음모의 희생이 되어 세상을 떠난 이 위대한 인물과 그의 동료들에게 바치기 위해 정부는 1961년 9월 19일 화요일을 국가 애도일로 지정한다."[1]

8. 이 사건을 다룬 작품


  • 메이데이!: 항공 사고의 진실과 진상 시즌 13(원래는 시즌 15) 5화 "치명적인 임무"
  • 자도빌 포위전 - 6일간의 전투 -(`The Siege of Jadotville`)

::: 2016년에 공개된 영화이다. 작중에서 함마르셸드의 탑승기는 F-4 전투기에 격추되었으며, 카탕가 공화국 총리 모이즈 촘베가 명령했다고 시사하고 있다. 단, 작중에서 아일랜드군 지휘관 팻 퀸란 휘하의 평화 유지군에 대한 카탕가 군의 6일간의 공격 중에 추락했다고 하는 점은 부정확하다. 사실상 함마르셸드의 추락 사건은 포위된 아일랜드군 분견대가 항복한 다음 날이었다.

  • Cold Case Hammarskjöld|Cold Case Hammarskjöld|누가 함마르셸드를 죽였는가영어

::: 2019년에 공개된 다큐멘터리 영화이다. 이 작품에서는 벨기에인 용병 전투기 조종사가 명령을 받고 격추했다고 증언하고 있다. 일본에서도 2020년 7월에 공개되었다.

참조

[1] 웹사이트 ベルギー人操縦士が攻撃か 61年の国連事務総長機墜落 https://web.archive.[...] mainichi.jp 2019-01-13
[2] 문서 Rhodesian Board of Investigation
[3] 문서 Rhodesian Commission of Inquiry
[4] 문서 United Nations Commission of Investigation
[5] 웹사이트 RAF veteran ‘admitted 1961 killing of UN secretary general’ https://www.theguard[...] Guardian 2019-0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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